선거 참관인의 하루

어쩌다가 미아 5동 제 2번 투표소의 투표 참관인이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잘난거라곤 하나도 없는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투표 참관인이 되었는지는 귀찮으므로 생략.

근데 투표참관인이라 뭔가 멋지지 않은가?


오오, 투표 참관인, 오오. 뭔가 공권력? 국민의 힘 막 그런거?

참관인한테 부정행위 걸리면 막 머라 하고 막 쫒겨내는 그런거임?

다들 참관인 눈치 설설 보다가 참관인님 이것좀 드십셔, 하고 막 뭐좀 가져다 바치고 그러는건가? 했는데



그냥 투표 잘하나 안하나 6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서 지켜만 봤다.

장장 6시간 동안

아니, 당장 화장실이 가고싶어도

나에게 부여된 시민민주주의의 기본인 숭고한 참관인의 의무를 저버릴 수가 있어야지.


게다가 그 6시간동안 나에게 주어진 건 한평 남짓한 공간과 엉덩이가 뭉개지는 접이식 의자 하나뿐.

이건 지옥이야 제길.


사람이 심심해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경험했다고할까.

게다가 참관인으로써 투표 진행과정 전체를 감시해야 되니까, 책을 본다거나 잠을 잔다거나 딴청을 피운다거나 할수는 더더욱 없다.

그냥 6시간동안 투표 과정을 외워버렸지뭐.



근데, 직접 투표장에 있어보니 이번 18대 총선의 분위기라든가 동향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일단 참관인들은 5시 40분까지 모이라고 해서 넉넉잡아 5시 35분쯤에 투표장소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도착한 참관인은 나 혼자였다.

그리고 5시 50분까지도 나 혼자였다.

심지어 모모당의 모 참관인은 6시 30분쯤 되서야 왔다.

랄까, 이게 우리 국민 의식이라는거죠.



그래도 투표는 6시에 딱 시작 했는데, 내가 정말 놀란건

'투표시작 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우르르 몰려오는 노인분들.

투표 시작 20분 전쯤부터, 즉 약 5시 40분쯤부터 투표장 입구에 줄이 생겼고

투표하고자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근데 그분들의 나이는 모두 50대 이상.


아무리 노인들이 할일이 없고 새벽잠이 적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그냥 노인분들은 혼자 혹은 여럿이 오셔서 당연하다는 듯이 푹 찍고 스윽 사라지신다.

뭐랄까, 한 오전 7시까지 투표자중 아줌마 한 명 빼고 죄다 노인분들이었다.

대한민국은 뭐 노인을 위한 나라임?

좀 나아지겠지 했는데

7시 이후로 30~40대가 간간히 보이긴 했다.

그리고 12시에 내가 나올 때 까지

20대는 딱 3명봤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절망했다. 진짜로. 젊은이들에게 절망했다. 집에와서 보니 20대층 투표일이 20%대더군.

별로 할 말도 없다.

그냥 앞으론 내 주변에서 정치 이야기 안들렸으면 한다. 아니면 그 20%만 이야기 하던가.



뭐, 여러가지 헤프닝이 있었다.

비례대표 투표함과 지역구 의원 투표함을 헷갈리시는 투표자들은 말 할 것 도 없고

투표함에 주민등록증을 집어넣으시는 할머니도 계시고

두 투표용지를 쏙 바꿔서 넣으시는 분도 계시고

나눠주는 투표 확인증을 투표함에 넣으시는 분도 계셨고

기표기로 후보자 이름 바로 옆에다가 자랑스럽게 쾅 찍으시는 분도 계셨고

잘 안찍힌다고 두번씩 찍는 분도 계셨고

문국현 후보가 나온 정당이 몇번당이냐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셨고

기표소에 들어가셔서 친구분에게 전화해서 '너 어디뽑았냐? 뽑을 당이 없는데 어디 뽑아야되?' 하시는 분도 계셨고


하여간 참 다양했다.



근데 내가 느낀바로는


사람들이 누구를 뽑을 것 인가는, 기표함에 들어가서 기표기를 들고 투표용지에 꽝 하고 내려 찍기 1초전에 결정되는것 같다.

물론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사전에 결정해서 가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분들이 누가 누구고 어디가 뭔지도 모른채 기표소에 들어가서 기표기를 손에 잡은 그 순간부터 진지하게 고민을 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과정은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 몇 초만에 개인의 의사가 결정되는거다.


그게 아니면

그냥 어제 있었던 술자리에서 친구가 취해서 내뱉은 몇마디에 영향을 받아 뽑으시거나.


그정도로, 우리의 의식은 한없이 시궁창이다.


뭐, 섵부른 일반화는 안되겠지만 말이지비.





그리고 부끄럽게도 참관을 하다 깜빡 졸았는데 그때 꾼 꿈이 참 웃겼다.

꿈에서 웬 할머니 한 분이 나한테 오셔서

'근디 어느정당을 찍어야 뎌?' 그러시길래 난 당연히 중립적으로

'지지하시는 정당 찍으시면 되요.' 라고 설명해 드렸다.

근데 그랬더니 내 옆에 있던 선관위에서 나온 아저씨가

'이봐요! 투표소에선 특정 정당 지지 발언 금지인거 몰라요?' 라면서 나를 막 혼냈다.

나는 황당해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언제 특정정당을 지지했어요?' 라면서 막 싸웠는데

그 선관위 아저씨가 보여준 투표용지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

그 아저씨가 보여준 비례대표용 투표용지에는




정당기호 1. 지지하시는 정당.

정당기호 2. 좋아하는 정당

정당기호 3. 아무당

정당기호 4. 싫어하는 정당

정당기호 5. 마음에 드는 정당

정당기호 6. 포도당

정당기호 7. 찍고싶은 정당.

정당기호 8. 원하시는 정당



따위로 되어있었다.

결국 난 울면서 내 잘못을 빌다가 잠에서 깼다.



고등학교때 학교 근처 분식점 메뉴중에

아무거나 : 3천원

이것 : 5천원

저것 : 만원


이라고 되어있던거랑 비슷한건가...


근데 웬지 저런 작명센스도 좋지 않은가?


여러분은 그저 '지지하시는 정당'찍으시면 됩니다. 녜, 그러므닙죠.


덧글

  • 라피니 2008/04/09 23:25 #

    대한민국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아니라 "젊은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의 느낌
  • 커맨더 2008/04/10 01:04 #

    전 부재자투표 제도가 뭔지 모르고있다가 (그냥 근처 투표소 가서 찍으면되겠지라고 생각)투표소 가서 봉변당했습니다.

    으흥흐으흐그흐으그흐으그그흗그ㅡ그흐극
  • 이스킨★ 2008/04/12 08:33 #

    난 투표했다는거.
  • Fedaykin 2008/04/12 22:08 #

    라피니// 어쩌면 그냥 '나라는 없다' 일지도 모르겄네 ㄷㄷ
    커맨더// 저런저런. 소중한 한표를 날리지 못하셨군요 ㅠㅠ
    이스킨// 군인정신이군 ㄲㄲ 군바리들은 투표도 각잡고하농?
  • 이스킨★ 2008/04/16 18:38 #

    페다이//군인정신이지. 강제로 시키더라; 난 각잡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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