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몇일 전의 일이다.
고모댁에 인사 드리고 막 빌라를 나오는데 뒤에서 '저기요, 저기요'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모댁 말고는 이동네에 연고도 없는 나를 누가 그렇게 부르나 봤더니 핫-핑크 칼라의 아우터에 예쁜 털모자까지 쓰신 멋쟁이 할머니 한분이 손을 휘저으며 걸어와 나를 붙잡으셨다.

음, 새로운 마을에 도착했을때 주어지는 퀘스트인가 하고 설명을 들어봤다.

사정을 들어보니 집에 테레비가 고장이 나서 테레비를 보지 못하고 계시다고 했다. 테레비가 고장이 나서 기능이 망가지더라도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테레비가 보이지 않을 리는 없고, 정말 테레비가 보이지 않으신다면 그건 인지능력에 문제가 생긴거니까 무척 큰일이겠지만 아마 그런 의미는 아닐 테다.

테레비가 나오지 않는다니 그럼 테레비가 고장이 났을 수 있겠네요

하고 상황을 정리해서 말씀드리니 그러니까 그걸 젊은 양반이 좀 봐달라고 하셨다. 나야 아직 젊고 시력에 큰 문제가 없으니 테레비라는것이 실존 한다면 내 눈에 보이겠지만 이게 그런 문제는 아닐거다.

물론 어쩌다 붙잡힌 나는 네츄럴 본 공돌이라 도구가 없으니 자가 수리는 못해도 자가 진단정도야 해서 as기사를 부를 수야 있겠지만 그걸 굳이 지나가는 행인 1인 내가 해야 될 필요도 없고 집에 젊은 사람이나 친족 누구한테 전화를 해서 해결 하시면 될텐데 왜이러시나, 예전에 길 묻는 할머니, 무거운거 들어달라는 할머니랑 같이 활동하던 인신매매단이 있었는데 이거 젊은 양반이 어디로 끌려 가는거 아닌가 간을 좀 보고 있었는데 그 다음 말에 할머니 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혼자 사는디 테레비가 안나와서 이틀째 보지를 못하고 있으니 죽겠어요
그날이 추석 차례 전날이었다. 그게 뭔 소리냐면 추석 전날인데 누군가가 방문한 일도 없었고 그럴 계획도, 예정도 없다는거 아니겠나.

그럼 제가 잠깐 가서 보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혀유 젊은 양반.

놀랍게도 할머님은 우리 고모댁 같은층의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셨다. 조금 전 까지 내가 고모와 인사했던 집 바로 옆집이다.
처음 만났던 장소로 보아 마실이라도 다녀오시지 싶었는데, 현관 문은 어떠한 잠금장치도 없이 바로 열렸다. 현관문에 바이오 잠금장치라도 있지 않는한 문도 열고 다니시나 보다. 할머님을 따라서 들어간 안방에는 문제의 테레비가 있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지직 거리며 한대 맞으면 흑백과 칼라의 전환이 되는 두꺼운 CRT 테레비를 생각 했지만, 안방 침대 옆 탁상위에 올려져있는 테레비는 삼성제 30인치쯤 되는 LED 테레비였다. 그 옆에 있는 쪽지에는 전파사 전화번호가 큰 글씨의 매직으로 적혀있었다. 여기다가 전화를 해보시지, 아 연휴구나. 얼른 스캔을 시작했다.

안방엔 침대와 테레비, 장롱과 탁자가 세간의 전부였다. 이래서 문을 잠그고 다닐 필요가 없으신가보다.

테레비의 전원 버튼...은 삼성의 우수한 디자이너가 온힘을 다해 숨겨놓은 덕택에 못찾겠고, 리모콘의 전원을 누르니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이럴때 제일 처음 해야할것은 한 대 패는게 아니라 전원선이 제대로 꽂혀 있는지 확인하는거다. 티비 뒤를 보고 전원선을 따라서 쭉 가보니까 멀티 탭에 전원선이 꽂혀있다. 그럼 멀티탭을 따라 가...기 전에 다시 보니 전원선이 멀티텝에 반만 꽂혀있었다.

나머지 반을 꽂아놓고 리모콘을 눌렀더니 검은 화면에 SAMSUNG 이라는 로고가 뜬다.

아이고 나오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뼉을 치며 좋아하시다가 연신 허리를 숙이시는 할머니를 진정시켜드리고 어디뭐 다른 문제는 없나, 리모콘을 몇번 더 돌려봤다. 이런저런 방송은 쭉쭉 나오는데 mbc랑 kbs 같은 채널 몇개가 등록되어있지가 않아서 채널 + - 버튼으로 이동이 불가능했다.

몇번 주로 보세요?
11번 하고 sbs 봐요.
11번 어떻게 트세요?
이렇게 11번 누르면 나와요.

일부러 빼놓았을 수도 있지만, 비슷한 일이 있어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5번부터 13번까지 채널 등록을 해 드리고 채널 버튼으로도 11번도 이동이 가능한걸 보여드린뒤에 인사를 드렸다. 사이에는 홈쇼핑 채널도 들어가있었는데 그거야 원래 있던거니까 뭐.

혹시나 할머니가 적적하셔서 일부러 코드를 빼놓고 손님을 유혹하는 그런 취미가 있으신가 하고 당장 떠나겠다는 말 없이 좀 어버버 해봤는데, 할머님은 손님인 나보다는 테레비에 나오는 이름 모르는 연예인 아자씨한테서 눈을 못떼고 계시길래 그런건 아닌갑다 하고

그럼 어르신 추석 잘 쇠십쇼
아이구 감사혀요

하고 나왔다.
그게 추석 전날의 일이다.
민족의 대명절이자 단군이래 최장기 휴일에 있었던 일이다.
어디 먼 지방도 아니고 서울 변두리 도봉산 밑자락 인구 33만되는 도봉구의 일이다.
지금 이 순간은 또 얼마나 많은 할머님 할아버님이 나오지 않는 티비를 보며 시간을 보내실까.

생각해보면 친할어머니, 외할머니 모두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병원 들어가시기 전 까지는 가족들과 같이 사셨으니까 좀 다른걸까.

돈 많은 노인은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돈 없는 노인은 자기 집에서 돌아가시는게 요즘 트랜드인가보다.

그냥 세상이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한시간 이상 진지하게 생각해보진 않은것 같다.

그러고 나는 학교로 와서 일을 하다가 마침 학교에 사는 또다른 독거노인 한명이 있어서 같이 피자를 먹었다.

내 제사상엔 피자나 올라갔으면 좋겠다. 고기는 육해공 하나씩. 하겐다즈는 드라이아이스 포장해서.

잡담

기존의 산업혁명은 대충 어떤 물건, 섬유나, 자동차나 먹거리 까지도, 뭐여튼 그런 것들을 기계의 힘을 빌어 대량으로 쉽게 생산이 가능하게 된 것인데, 4차 산업혁명이고 뭐시고 AI 어쩌고 무슨 혁명에서 내가 제일 기대 하는 부분은 물건의 대량 생산이 아니라 창작물의 대량 생산이다.

예컨데 만화라고 하면 지금은 만화가 한명 밑에 줄줄이 도제들이 들러 붙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그려라 하고 대충 틀을 잡아주면 그 밑에 사람들이 먹선 치고 스크린톤 넣고 색깔 넣고 컵라면 먹고 뭐 그러는데, 이게 AI로 대체 되면 인간은 작가 혼자서 대충 인간 제자(인지 노예인지)한테 말하듯이 '좀 더 밝게', '여긴 좀 더 강하게' '구도 바꿔서 다시' , '표정이 별루야', '이부분은 좀 더 유채화 톤으로' 식으로 인간 혼자 AI를 후두려 패서 작품을 만들게 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지 싶다. 이건 이미 어느정도 이뤄지고 있는 것이, 옛날 모모 선생님 같으면 죽어도 못했을 풀-칼라 만화를 혼자서 일주일마다 그리는 사람들이 네이버나 다음에 널리고 널렸다. (물론 정식 연재 할 정도면 분업을 하긴 하는데 다 그런건 아님)

동영상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뭐 애들이 UCC 하나 만든다고 하면 조를 짜서 뭐 영상을 언제 찍고 어떻게 만들고 회의를 하고 편집하고 일주일씩 걸리고 그러는데, 그게 진짜로 AI가 확 들어가서 cg영상 제작과 편집이 쉬워지면 나중에는 지금 휴대폰으로 문자를 쓰는것처럼 편하게 가상의 영상을 만드는것도 가능 하겠지. 그때 되면 내 얼굴과 목소리 소스를 등록 해놓고 영상도 가짜로 만들고 목소리도 자동으로 합성해서 정보를 전달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게 더 발달하게 되면 누가 만들어놓은 영화나 만화를 보러 가는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영화와 만화를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돈내고 가입하고 그럴거다. 아 오늘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덴마를 보고 싶어! 하면 컴퓨터가 삐비빅 하더니 3차원 움직이는 만화로 보여주는거다. 어느날 기분이 좀 꿀꿀하면 매드맥스를! 강남 대로에서! 막! 다 죽이고! 특히 김부장 그놈이 악당으로 나와서 처참하게 죽는거! 어! 쿠엔틴 타란티노식으로! 하면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딱 나오겠지. 물론 결제는 삼성페이나 카카오페이로 할거다.

넘쳐나는 수많은 영화-만화 제작 AI중에 나한테 뭐가 제일 잘 맞는지는 내가 잘 아는 영화평론가이자 유우명한 블로거 '김평가'님이 추천해주실거고. 그 블로거는 사실 카카오에서 20%, 네이버에서 10%, 구글에서 50%, 미래창조과학부에서 20% 지분을 대서 만든 첨단 광고봇일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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